진주 민가에 머물고 있는 동안의 박정희 대통령 / 사진출처 : 월간조선 |
1930년대 중반 朴正熙가 다닌 대구사범 5년간의 성적표는 대구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공개를 금지시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정희의 집권시절에 나온 傳記類(전기류)에서는 1등만 한 구미보통학교의 성적표는 소개하면서도 사범학교 시절의 성적은 그냥 ‘우수한 편’, ‘중간 정도’식으로 넘어갔었다.
기자는 작고한 李洛善(이낙선·상공부 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했었다.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었던 ‘박정희 파일’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했다.
박정희는 입학 시험에서는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 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는 74명 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 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 중 69등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성적표가 그의 시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란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操行(조행)’ 평가는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 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 있다.
志操(지조)는 ‘堅實(견실)’, 습관은 ‘寡言(과언)’, 사상은 ‘穩正(온정)’, 학습태도는 ‘보통’으로 평가됐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 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성적이 꼴찌권을 맴도는 바람에 한 달에 7원씩 나오는 官費(관비)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7원이면 대략 쌀 반 가마값이었다. 반에서 40등 이내에 드는 관비생들은 7원을 받으면 食費(식비)로 4원 50전, 기타 共用(공용)으로 2원을 기숙사에 내야 했다.
기숙사의 운영은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집에서 부쳐주는 식비를 기다리다가 늦어지면 외상밥 또는 눈칫밥을 먹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이럴 때면 고향인 상모리로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조카인 박재석(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은 ‘월사금은 없고 돈까지 준다’는 대구사범에 다니는 삼촌이 시도 때도 없이 돈을 구하러 내려와서는 며칠씩 놀다가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삼촌 박정희는 이불 보퉁이와 빨래감을 갖고 와서 어머니한테 맡겨놓고는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운영하던 박상희의 집을 찾아와서는 눌어붙는 것이었다. 박상희는 박재석을 불러들인 다음 손바닥만 한 메모지에 글을 써 주는 것이었다. ‘우리 조카를 보내는데 제 동생의 학비 후원 부탁드립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이런 메모를 가지고 박재석은 구미면장, 곡물검사소장 같은 구미면 내의 유지들을 찾아다녔다.
“그 분들은 일하다가 말고 제가 드린 쪽지를 읽으시고는 돈을 봉투에 넣어 건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적게는 1원, 많게는 5원씩 주셨습니다. 저는 이 봉투들을 상희 삼촌에게 드리는데 그분은 열어볼 생각도 않고서 ‘네 아제 갖다 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셨지요. 좀 골치아파했지요.”
박정희의 상모리 친구들은 나팔소리를 듣고서 그가 왔다는 것을 알곤 했다. 뒷동산에 올라 부르는 군용 나팔 소리. 그것은 가난과 꼴찌, 그리고 일제(日帝)의 억압에 찌들린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하나의 몸부림이었으리라.
박정희 학생의 성적표 ‘취미’란에는 ‘검도’라고 되어 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사격, 나팔, 육상에 뛰어났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군사 및 체육과목에서 활발했다는 것은 그의 신체발육상태가 많이 향상된 것을 반영한다. 5학년 때 그는 키가 159.2cm에 몸무게는 59.5kg, 가슴둘레 88cm로서 ‘甲(갑)’의 평가를 받았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괜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이 ‘박정희 파일’에는 동기생(대구사범 4회)인 石光守(석광수·작고·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 소령에게 보낸 편지가 철해져 있었다. 학창시절의 박정희를 평한 편지였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중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였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군악대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심신 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 했으나 (머리는) 우수한 편이었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동기생 曺增出(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이 써 보낸 인물평도 있었다.
<대체로 내성적인 편이었고 항상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였으나 外表(외표)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진정한 위인됨을 파악한 學友(학우)가 희소하였다. 다른 학우들은 장차의 이상 및 포부에 대하여 종종 피력하였으나 그는 일절 침묵을 지켜왔고 交友(교우)의 범위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勇者(용자)로서 방과 후에는 죽검을 들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학우들과 장난칠 때도 검도하는 흉내를 내어 머리를 치곤 했다. 나팔의 제 1인자로서 큰 버드나무 아래서 하급생들을 데리고 나팔 연습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기계 체조도 잘했다. 4, 5학년 여름 휴가 때는 대구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교련에 매우 취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난다. 시범 때 그가 자주 조교로 뽑혀 나왔다. 특히 총검술은 직업군인을 능가할 정도로 우수하였다.>
조증출은 이 편지에서 당시 대구사범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일본 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들만 모아 놓았기 때문에 교육 이념이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神格化(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 사이에서는 민족적 의분심이 불타올라 소위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소설을 읽을 때도 일본인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읽지 않고서 세계 문학 전집을 읽었다. 기숙사에서도 탄압에 굴하지 않고 조선, 동아일보를 구독하였고 ‘개벽’같은 잡지도 읽었다. 특히 신문 연재 소설 중에서는 ‘상록수’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가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 방편이었다.
1학년이 기숙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기숙사 안에서는 게다를 신지 못하게 하였다. 국어 담당이신 金永驥(김영기) 선생이 국어 시간에 우리 국사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많은 감명을 주었다. 박정희는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 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하였다. 박정희의 인품은 이 사생활을 통해서 배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체 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 정신을 도야하게 되었고 小我(소아)를 大義的(대의적) 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素地(소지)를 함양하였다.>
박정희는 학업에서는 바닥을 기고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하는 二重苦(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군사 훈련과 체육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皇民化(황민화)를 목적으로 한 학과교육을 충실히 하여 모범생이 되는 길은 포기하고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군사 교육에는 열심이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이런 선별적 수용이 ‘나는 민족혼을 너희들에게 팔지는 않겠다. 그 대신 군사문화의 실질은 적극적으로 배우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라면 그의 꼴찌는 ‘이유 있는 꼴찌’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932년 4월8일 대구사범 대강당에서 열린 4기 입학식에서 박정희도 다른 학생들처럼 히라야마 마사시(平山正) 교장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히라야마 교장은 학생들을 향해서는 일본 말로 연설을 한 뒤에 학부형들을 향해서는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4기 입학생으로서 교정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분위기는 무거웠다. 3년 선배인 尋常科(심상과) 1기 학생들 중 27명이 사회주의자 玄俊赫(현준혁) 교사가 조직한 독서회(사회과학연구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퇴학을 당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1기로 입학한 한국인 학생은 93명 중 86명인데 졸업자는 55명이었다. 탈락자 31명은 거의가 抗日(항일) 운동에 관계했다가 퇴학을 당한 것이었다.
광복 뒤 김일성의 지시로 암살되는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대구사범의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29년이었다. 평남 개천 사람인 그는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대구에 첫 직장을 구해서 온 것이었다.
박정희가 3학년일 때인 1934년 4월에 또 독서 사건이 터졌다. 1기 선배인 4학년생 중 진두현 등 여섯 학생들이 독서회를 만들어 사회주의 책들을 읽다가 퇴학당한 뒤에 구속되었다. 진두현을 유치장에 집어넣으면서 조선인 형사가 말했다.
“玄(현)이란 새끼가 뿌린 씨앗은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뿌리째 뽑고 말 것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진두현은 <조선일보>에서 읽은 칼럼 한 구절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조선사람은 감옥살이를 2∼3년 해야만 옳은 조선 사람이 될 수 있다.’
진두현은 ‘나도 이젠 옳은 조선 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으로써 옥살이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5월에 박정희는 3학년생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철원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내금강 입구 말휘리역에 도착하니 태평여관에서 큰 旗(기)를 가지고 나와서 여행단을 환영해 주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 여관에서는 학생들을 정성들여 모셨다. 조선 음식도 맛있었고 잠자리도 쾌적했다. 다음날 내금강을 구경한 뒤에 도착한 곳은 日人(일본인)이 경영하는 구미산장이었다.
일본인 주인의 대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1박3식에 돈은 태평여관보다도 세 배나 많은 2원을 받으면서 저녁은 맛없는 일본식이고 잠자리는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재우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학생들은 내일 점심 도시락은 이 여관 것으로는 먹고 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고 식대는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일본인 주인은 내일 도시락 반찬은 이미 준비하였으니 먹든지 안 먹든지 돈은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오기가 발동했다. 다음날 아침에 여관을 나설 때 여관에서 준비해둔 도시락을 아무도 갖고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인 인솔 교사가 “오늘 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지 않는다”면서 도시락을 가져갈 것을 권해도 듣지 않았다. 학생들은 점심을 굶어가면서 외금강을 구경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인솔 교사도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는데 도리카이(鳥飼) 교장이 이를 알고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鄭明模(정명모), 鄭憲旭(정헌욱) 두 사람이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하고 유만식은 무기정학, 다른 일곱 명은 1주간의 근신처분을 당했다. 학교에서는 이들 학생들의 부모를 불렀다. 학생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틀 동안 이들 부모들은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금강산 비로봉 사건’으로 불린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정찬은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이 금강산 여행 중에 들르는 상점과 공원관리사무소에서마다 기념도장을 받아와서는 스탬프集(집)을 만들었다.
여기에 친구들의 한마디를 실었는데 유독 박정희가 쓴 글이 튄다.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약간 고쳐서 소개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다른 동기생들은 ‘아! 평생에 보고 싶던 우리 금강산이여! 이제 보고 나니 晩時之歎(만시지탄)이 없을 수 없네’식으로 자연을 자연으로만 보는데 박정희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열일곱 학생의 마음속에서 중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만든 비범한 성격은 자신의 恨(한)을 민족의 恨과 한덩어리로 파악한 점이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恨만을 풀려고 했더라면 그는 이기적인 입신출세주의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시절에도 특별히 정의감이 있는 소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의감이 가르쳐지는 것인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대구사범에 와서는 정의감이 강한 학생임을 엿보게 하는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5학년생 박정희의 일본어로 쓴 시를 읽어본다.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이 시를 한 일본기자에게 읽어보게 했더니 “언어감각이 참 뛰어나고 순수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의 운율도 잘 맞아떨어져 노래 가사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박정희는 자신의 詩(시)에 다가 1, 2, 3의 번호를 붙여놓아 그가 작사한 몇 가지 노래의 가사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以上(이상)’이라고 써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여기에서도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박정희의 정신자세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곳하고 소박한 것에 대한 박정희의 동경이다. 들꽃과 농부로 상징되는 弱者(약자)와 소박성, 거기에 대칭되는 귀부인과 영웅 사이에서 박정희는 弱者 편에 서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 간 强者(강자)와 富者(부자)에 대한 반골의식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소박성은 이미 대구사범 교정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 學科(학과) 성적은 꼴찌였지만 人格(인격)의 바탕이 되는 '인문교육'은 제대로 받았고 이게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든 요인이란 생각도 든다. 人文學(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를 포함한 全人的 (전인적) 배움이다. 박정희 학생은 역사와 문학을 좋아하고, 생각을 깊이하였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루었으며, 교련에도 능숙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밑변을 만드는 素養(소양)이다. 밑변이 크면 높게 올라갈 수 있듯이 인문적 소양을 청소년기에 잘 다져놓으면 여기에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심어 풍성한 인생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일본식 교육의 장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자는 작고한 李洛善(이낙선·상공부 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했었다.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었던 ‘박정희 파일’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했다.
박정희는 입학 시험에서는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 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는 74명 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 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 중 69등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성적표가 그의 시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란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操行(조행)’ 평가는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 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 있다.
志操(지조)는 ‘堅實(견실)’, 습관은 ‘寡言(과언)’, 사상은 ‘穩正(온정)’, 학습태도는 ‘보통’으로 평가됐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 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성적이 꼴찌권을 맴도는 바람에 한 달에 7원씩 나오는 官費(관비)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7원이면 대략 쌀 반 가마값이었다. 반에서 40등 이내에 드는 관비생들은 7원을 받으면 食費(식비)로 4원 50전, 기타 共用(공용)으로 2원을 기숙사에 내야 했다.
기숙사의 운영은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집에서 부쳐주는 식비를 기다리다가 늦어지면 외상밥 또는 눈칫밥을 먹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이럴 때면 고향인 상모리로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조카인 박재석(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은 ‘월사금은 없고 돈까지 준다’는 대구사범에 다니는 삼촌이 시도 때도 없이 돈을 구하러 내려와서는 며칠씩 놀다가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삼촌 박정희는 이불 보퉁이와 빨래감을 갖고 와서 어머니한테 맡겨놓고는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운영하던 박상희의 집을 찾아와서는 눌어붙는 것이었다. 박상희는 박재석을 불러들인 다음 손바닥만 한 메모지에 글을 써 주는 것이었다. ‘우리 조카를 보내는데 제 동생의 학비 후원 부탁드립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이런 메모를 가지고 박재석은 구미면장, 곡물검사소장 같은 구미면 내의 유지들을 찾아다녔다.
“그 분들은 일하다가 말고 제가 드린 쪽지를 읽으시고는 돈을 봉투에 넣어 건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적게는 1원, 많게는 5원씩 주셨습니다. 저는 이 봉투들을 상희 삼촌에게 드리는데 그분은 열어볼 생각도 않고서 ‘네 아제 갖다 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셨지요. 좀 골치아파했지요.”
박정희의 상모리 친구들은 나팔소리를 듣고서 그가 왔다는 것을 알곤 했다. 뒷동산에 올라 부르는 군용 나팔 소리. 그것은 가난과 꼴찌, 그리고 일제(日帝)의 억압에 찌들린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하나의 몸부림이었으리라.
박정희 학생의 성적표 ‘취미’란에는 ‘검도’라고 되어 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사격, 나팔, 육상에 뛰어났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군사 및 체육과목에서 활발했다는 것은 그의 신체발육상태가 많이 향상된 것을 반영한다. 5학년 때 그는 키가 159.2cm에 몸무게는 59.5kg, 가슴둘레 88cm로서 ‘甲(갑)’의 평가를 받았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괜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이 ‘박정희 파일’에는 동기생(대구사범 4회)인 石光守(석광수·작고·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 소령에게 보낸 편지가 철해져 있었다. 학창시절의 박정희를 평한 편지였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중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였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군악대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심신 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 했으나 (머리는) 우수한 편이었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동기생 曺增出(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이 써 보낸 인물평도 있었다.
<대체로 내성적인 편이었고 항상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였으나 外表(외표)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진정한 위인됨을 파악한 學友(학우)가 희소하였다. 다른 학우들은 장차의 이상 및 포부에 대하여 종종 피력하였으나 그는 일절 침묵을 지켜왔고 交友(교우)의 범위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勇者(용자)로서 방과 후에는 죽검을 들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학우들과 장난칠 때도 검도하는 흉내를 내어 머리를 치곤 했다. 나팔의 제 1인자로서 큰 버드나무 아래서 하급생들을 데리고 나팔 연습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기계 체조도 잘했다. 4, 5학년 여름 휴가 때는 대구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교련에 매우 취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난다. 시범 때 그가 자주 조교로 뽑혀 나왔다. 특히 총검술은 직업군인을 능가할 정도로 우수하였다.>
조증출은 이 편지에서 당시 대구사범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일본 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들만 모아 놓았기 때문에 교육 이념이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神格化(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 사이에서는 민족적 의분심이 불타올라 소위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소설을 읽을 때도 일본인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읽지 않고서 세계 문학 전집을 읽었다. 기숙사에서도 탄압에 굴하지 않고 조선, 동아일보를 구독하였고 ‘개벽’같은 잡지도 읽었다. 특히 신문 연재 소설 중에서는 ‘상록수’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가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 방편이었다.
1학년이 기숙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기숙사 안에서는 게다를 신지 못하게 하였다. 국어 담당이신 金永驥(김영기) 선생이 국어 시간에 우리 국사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많은 감명을 주었다. 박정희는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 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하였다. 박정희의 인품은 이 사생활을 통해서 배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체 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 정신을 도야하게 되었고 小我(소아)를 大義的(대의적) 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素地(소지)를 함양하였다.>
박정희는 학업에서는 바닥을 기고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하는 二重苦(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군사 훈련과 체육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皇民化(황민화)를 목적으로 한 학과교육을 충실히 하여 모범생이 되는 길은 포기하고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군사 교육에는 열심이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이런 선별적 수용이 ‘나는 민족혼을 너희들에게 팔지는 않겠다. 그 대신 군사문화의 실질은 적극적으로 배우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라면 그의 꼴찌는 ‘이유 있는 꼴찌’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932년 4월8일 대구사범 대강당에서 열린 4기 입학식에서 박정희도 다른 학생들처럼 히라야마 마사시(平山正) 교장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히라야마 교장은 학생들을 향해서는 일본 말로 연설을 한 뒤에 학부형들을 향해서는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4기 입학생으로서 교정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분위기는 무거웠다. 3년 선배인 尋常科(심상과) 1기 학생들 중 27명이 사회주의자 玄俊赫(현준혁) 교사가 조직한 독서회(사회과학연구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퇴학을 당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1기로 입학한 한국인 학생은 93명 중 86명인데 졸업자는 55명이었다. 탈락자 31명은 거의가 抗日(항일) 운동에 관계했다가 퇴학을 당한 것이었다.
광복 뒤 김일성의 지시로 암살되는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대구사범의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29년이었다. 평남 개천 사람인 그는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대구에 첫 직장을 구해서 온 것이었다.
박정희가 3학년일 때인 1934년 4월에 또 독서 사건이 터졌다. 1기 선배인 4학년생 중 진두현 등 여섯 학생들이 독서회를 만들어 사회주의 책들을 읽다가 퇴학당한 뒤에 구속되었다. 진두현을 유치장에 집어넣으면서 조선인 형사가 말했다.
“玄(현)이란 새끼가 뿌린 씨앗은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뿌리째 뽑고 말 것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진두현은 <조선일보>에서 읽은 칼럼 한 구절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조선사람은 감옥살이를 2∼3년 해야만 옳은 조선 사람이 될 수 있다.’
진두현은 ‘나도 이젠 옳은 조선 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으로써 옥살이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5월에 박정희는 3학년생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철원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내금강 입구 말휘리역에 도착하니 태평여관에서 큰 旗(기)를 가지고 나와서 여행단을 환영해 주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 여관에서는 학생들을 정성들여 모셨다. 조선 음식도 맛있었고 잠자리도 쾌적했다. 다음날 내금강을 구경한 뒤에 도착한 곳은 日人(일본인)이 경영하는 구미산장이었다.
일본인 주인의 대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1박3식에 돈은 태평여관보다도 세 배나 많은 2원을 받으면서 저녁은 맛없는 일본식이고 잠자리는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재우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학생들은 내일 점심 도시락은 이 여관 것으로는 먹고 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고 식대는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일본인 주인은 내일 도시락 반찬은 이미 준비하였으니 먹든지 안 먹든지 돈은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오기가 발동했다. 다음날 아침에 여관을 나설 때 여관에서 준비해둔 도시락을 아무도 갖고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인 인솔 교사가 “오늘 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지 않는다”면서 도시락을 가져갈 것을 권해도 듣지 않았다. 학생들은 점심을 굶어가면서 외금강을 구경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인솔 교사도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는데 도리카이(鳥飼) 교장이 이를 알고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鄭明模(정명모), 鄭憲旭(정헌욱) 두 사람이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하고 유만식은 무기정학, 다른 일곱 명은 1주간의 근신처분을 당했다. 학교에서는 이들 학생들의 부모를 불렀다. 학생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틀 동안 이들 부모들은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금강산 비로봉 사건’으로 불린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정찬은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이 금강산 여행 중에 들르는 상점과 공원관리사무소에서마다 기념도장을 받아와서는 스탬프集(집)을 만들었다.
여기에 친구들의 한마디를 실었는데 유독 박정희가 쓴 글이 튄다.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약간 고쳐서 소개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너는 세계의 명산!
아! 네 몸은 아름답고 森嚴(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다 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들은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 없다
금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희 씀.>
다른 동기생들은 ‘아! 평생에 보고 싶던 우리 금강산이여! 이제 보고 나니 晩時之歎(만시지탄)이 없을 수 없네’식으로 자연을 자연으로만 보는데 박정희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열일곱 학생의 마음속에서 중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만든 비범한 성격은 자신의 恨(한)을 민족의 恨과 한덩어리로 파악한 점이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恨만을 풀려고 했더라면 그는 이기적인 입신출세주의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시절에도 특별히 정의감이 있는 소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의감이 가르쳐지는 것인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대구사범에 와서는 정의감이 강한 학생임을 엿보게 하는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5학년생 박정희의 일본어로 쓴 시를 읽어본다.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이상>
이 시를 한 일본기자에게 읽어보게 했더니 “언어감각이 참 뛰어나고 순수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의 운율도 잘 맞아떨어져 노래 가사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박정희는 자신의 詩(시)에 다가 1, 2, 3의 번호를 붙여놓아 그가 작사한 몇 가지 노래의 가사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以上(이상)’이라고 써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여기에서도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박정희의 정신자세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곳하고 소박한 것에 대한 박정희의 동경이다. 들꽃과 농부로 상징되는 弱者(약자)와 소박성, 거기에 대칭되는 귀부인과 영웅 사이에서 박정희는 弱者 편에 서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 간 强者(강자)와 富者(부자)에 대한 반골의식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소박성은 이미 대구사범 교정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 學科(학과) 성적은 꼴찌였지만 人格(인격)의 바탕이 되는 '인문교육'은 제대로 받았고 이게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든 요인이란 생각도 든다. 人文學(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를 포함한 全人的 (전인적) 배움이다. 박정희 학생은 역사와 문학을 좋아하고, 생각을 깊이하였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루었으며, 교련에도 능숙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밑변을 만드는 素養(소양)이다. 밑변이 크면 높게 올라갈 수 있듯이 인문적 소양을 청소년기에 잘 다져놓으면 여기에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심어 풍성한 인생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일본식 교육의 장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가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꼴찌를 해도 열등감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한 학교, 학생, 부모가 그를 위대한 인간으로 키운 셈이다. 99점을 맞아도 울상이 되는 학생을 배출하는 요사이 한국식 교육에서 박정희가 나올까?